1. 15일은 추가합격발표 마지막 날이었다. 뭔가 할말이 있다기 보다는, 어쨌거나 입학하게 되었다는 심정.
무심하게 마우스를 잡고 자리에 앉은 나만큼이나, lcd 모니터는 표정이 없었다. 덤덤히 클릭 클릭,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렸고, 최종 결과를 확인하고 등록을 마치고선 담담히 앉았다. 흔들흔들, 일어나 기력없이 쇼파에 던진 몸은 깊게 꺼졌다. 고갤 드니 천장이 있었다. 왼쪽 거울엔 내 얼굴이 비친다. 무표정하게 뚱한 표정, 깍지낀 손, 가녀린 손목, 앙상한 배. 조금도 변하지 않은 자그마한 이곳의 풍경이 문득 낯설었다. 나는 여기에 그대로 있고, 그렇게 2년 7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텅빈 물병같았다. 무색무취한 것이 흘러버렸고 실제 그랬는지 어땠는지, 지나간 대부분의 것들은, 무색무취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으니 조금씩 숨이 차올랐다. 가슴 뛰는 포부와 열망, 새로운 이들을 만날거란 흥분, 그 관계에 대한 불안한 설렘이나 막연한 기대, 건설적인 계획과 소박한 소망과, 이제 또 시작이라는 새삼스런 다짐과 수험생활의 기억, 절반의 만족과 절반의 후회, 아쉬움, 뿌옇고 아련한 느낌들, 오래 보지 못했던 친구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들이, 조금씩 차올랐다.
정도의 감상일거라 상상했던 때가 있긴 했다. 아득히 오래전의 일이다. 그때의 나역시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며 신념이라든지 희망, 같은 단어에 벅차하고 꿈과 목표를 생각하며 눈을 빛내는 인간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드디어 이 생활이 끝이구나 싶은 것이. 요 몇년간 무심한듯 쉬크한 인간이 되어버린 건가, 싶기도 하고 시험을 잘치렀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 심지어 그런 생각도 사실은 들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도 사람이므로 사람을 만나며 산다는건 좋은 일이다.
2. 요즘은 달빛요정 3집을 듣는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3집 Goodbye Aluminium. 그는 루저다. 루저여서 루저를 노래한다. 나는 루저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루저여서 루저의 노래를 듣는다. 특히나 이번 3집은, 그의 마지막 앨범이 될지 모르므로, 절절하다. 루저의 결정판인것. 결국 <야구를 사랑하지만 끝내 프로가 될수는 없었던 소년, 그래도 소년은 꿈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달렸다. 사랑하는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 자체가 행복한 일일테고, 그렇게 버티다보면 세상도 언젠가 나란 존재를 알아주겠지, 하는 심정으로 달려온 세월.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꿈도 꿈이지만 밥은먹고 살아야함을, 연애는 해야함을, 결국 야구와 밥과 연애는 별개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그는 냉정한 프로의 세계를 떠난다. Goodbye Aluminium. 아마추어의 상징 알루미늄 방망이에 작별을 고하며. 나는 더이상 야구를 하지 않을거야. 안녕 안녕 안녕 알루미늄.> 정도의 이야기이다. 마흔이 넘은 사내는 더이상 달빛요정을 자처하며 역전만루홈런을 위한 노래를 하지 않는다.
그는 역전만루홈런을 위해 노래했겠지만, 그의 노래엔 언제나 홈런은 고사하고 내야 플라이와 병살타가 난무했다. 연인을 바래다 주던 길을 닭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며 추억하는 사내. 키작고 배나온 닭배달 아저씨가 된 자신이 부끄러워서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면, 않았으면 한다는 사내. 결국 나는 버텨내지 못했어,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배웠지만 그게 아닌것 같애, 내 인생의 영토는 여기까지 주공1단지 그대의 치킨런, 하고 울부짓는 노래는 대개 자괴에 가득차있고 자기비하적이다. 무슨 사랑노래를 해도 꼭 이렇게 찌질하게 해야하나 싶나. 그러나 나는, 그 찌질함이 맘에든다. 내가 찌질이여서 그런것도 있겠지만, 잘나고 멋진 인생은 관심을 주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므로 아무런 관심도 가지 않는다. 음악을 듣는것이 결국 삶을 위무하는 것이라면, 잘나고 멋진 인생들은 이미 모두가 부러워하고 찬사를 보내므로 나까지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애초에 그런것은 내게 초현실적이므로 닿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는데 무슨 정치적 올바름을 말하는건 아니고, 다만 주변의 울어대는 사랑노래 대부분은 내게 초현실적이다. 닿지 않는다.
3. 나역시 소녀시대나 원더걸스 카라에 하악대는 중생이지만, 그건 걔네들 음악을 즐기는게 아니라 예쁘고 싱그러운 이미지에 반응하는 것. 따로 찾지 않아도 지겹도록 매체에서 반복 노출되는 그들의 이미지를 접할때마다 정교한 세공품을 마주했을때의 느낌 같다. 그런것들은 매끈하고 세련되서 좋긴한데, 정이 가거나 삶이 묻어나는 애착이 가거나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달빛요정같은 찌질한 인생이 찌질한 노랠 하는걸 좋아하니까 병적인 자기연민에 빠져서 패배주의나 시덥잖은 냉소주의를 즐기는 인간은 아니냐는 오해가 있을수도 있지만, 그런건 아니고. 이를테면 <긍정의 힘이 중요하다>, <온힘을 다해 꿈을 믿으면 온 우주가 너에게 힘을 보태줄거야> 류의 자기계발서가 넘치는 가운데 <사람이 어떻게 늘 힘을 내고 사나요 난 미안해서 그런말 못하겠네요 우리 버티고 살아요 인생이 원래 그런거죠>, <가족은 세상에서 젤 가깝지만 그래서 지옥이 되기도 하죠 가족 구성은 랜덤이니까요> 같은 얘길 해주는, 안티-자기계발서를 읽는 것과 같다. 자기계발서의 맹점은, 언제 어디서나 통할 덕담을 한답시고 언제 어디서해도 하나마나 쓸모없는 뻔한 얘기나 늘어놔서 결국 어떠한 '자기계발'도 이끌어 낼수 없다는 것. 거기엔 어떤 상황의 특수성이나 맥락이 담겨 있지 않아서, 그런류의 책을 읽고나서 얻는 위안과 희망은 얄팍하고 공허하다. 얄팍하고 공허한 위안과 희망은 결국 쉬운 좌절로 연결될 뿐이어서 해로운 것이고. 여기서 제대로된 반성없이 끝없이 그런 류의 책을 읽는 것은 다시 쉬운 보상을 얻을지 몰라도 무익할 따름이다. 마치 마스터베이션같다. 진정한 자기계발을 원한다면, 위로와 희망을 원한다면, 작위적이고 지당한 말씀이 아니라 진지한 현실접근과 반성, 나와 같은 이들을 살피는 시선이 필요하다. 나의 고통이 나만의 것인지, 보편적인 것인지, 보편적인 시야로 문제를 살필수 있다면 자아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고, 문제의 해결을 돕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우선을 솔직해져야 한다. 맨얼굴의 자신을 볼수 있어야 한다.
달빛요정의 음악은 초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노래하고 솔직한 감상을 노래한다. 그 감상이 자기비하적이고 자괴에 가득차 있으며 비관적이라 해서 문제 될것은 없다. 우선은 솔직해지는 것이 먼저이고, 무엇보다 그 자기비하와 자괴와 비관의 목적은, 자기비하와 자괴와 비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그의 음악이, 마흔먹은 못생긴 아저씨가, 소녀시대나 원더걸스 카라보다 더 좋다. 그래서 소녀시대의 <Gee> 대신 <치킨런> 을 듣고, 자기계발서들 대신 김현진의 <당신의 스무살을 사랑하라>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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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쨌든 이쁜건, 이쁜거다.
하악하악
진리의 소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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